호혜경제: 간략한 개념과 역사



요즘 미국발 금융위기를 맞이하여 그동안 지배적인 경제담론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신자유주의가 주춤하기 시작하면서 호혜경제, 선물경제, 녹색경제, 사회적 경제와 같은 새로운 경제담론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차이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번에는 호혜경제라는 개념을 간단하게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 경제라는 개념의 역사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단어 중에서 '경제'라는 말만큼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제'란 무엇일까요? 우선 상식적으로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경제란 돈벌이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곧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이번 금융위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돈을 아무리 많이 벌더라도 전세계적인 상황 속에서 돈의 가치가 폭락해버리면 아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돈, 화폐라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렇다면 현대 경제학에서는 경제를 어떻게 정의할까요? 이에 대한 논의는 복잡하지만 간략하게 핵심적인 개념을 두가지 꼽아보자면 현대 경제학은 경제를 '희소성' 속에서의 최대한 '효율적 선택'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원은 제한되어 있는데 비용을 소모해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한다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경제적'라는 뜻이지요. 보통 신문에서 어떤 것을 규제할 것이 아니라 시장의 '효율성'에 맡겨야 된다는 이야기를 할때도 바로 이런 경제의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혜경제 역시 일종의 '경제'이므로 '희소성 속에서의 효율적 선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일까요? 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라는 개념 자체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 economy'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 oikonomia'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원래 '오이코노미아 oikonomia'라는 단어는 현대적인 의미의 '경제'와 같이 돈벌이, 혹은 희소성 속에서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가장이 자신의 가정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어떻게 보살필 것인가, 하인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가정의 재화를 어떻게 관리하며 재산을 늘일 것인가 등등. 그러므로 ‘오이코노미아 oikonomia’의 명사형인 '오이코노모스 oikonomos'는 가정을 돌보고 관리하는 직분이나 법칙을 말하며 현대어로는 '청지기'나, '경륜', '행정', '분배'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economy'가 '경제'가 아닌 '오이코노미아', 즉 가정의 통치라는 원래의 의미에 가장 가깝게 번역된 현대의 사례로는 기독교의 분파 중 하나인 '지방교회'의 지도자, 위트니스 리의 저서의 제목을 상기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책, 『The Economy of God』는 한국에서는 ‘하나님의 경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이코노모스'는 어떻게 현대적인 의미의 '경제'로 번역되기 시작했을까요? 우선 이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융성하게 된 '통치'에 관한 정치적 저작들의 논의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의『군주론』은 이러한 논의에서 일종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케이벨리 이전에 군주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신과 군주와의 연속성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군주의 통치는 자연과 신의 질서를 모델로 삼고 있으며 자연과 신의 섭리와 합치하는 한 올바른 것이었습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논파했는데, 그는 군주와 공국의 관계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그 관계는 일시적으로 결합된 것일 뿐이라는 점을 입증해보였습니다(『군주론』이 하필이면 정통적자가 아닌 왕권을 이양받은 메디치가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중요해지는 것은 자연과 신의 섭리가 아닌 세속화된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국가'를 '통치'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때부터 국가의 통치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국가의 통치의 모델로서 '오이코노모스'가 '가정'의 관리에서 '국가'의 관리로 범위로 확대되어 등장하게 됩니다. 국가의 통치는 바로 '정치'에 '오이코노미아'를 도입하는 것이며, 가장이 가정에서 가족과 재화를 다루는 방식이 국가가 주민 population과 재산 wealth을 통치하는 것으로 확대됩니다. 이로 인해 가정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실천으로서 '정치경제학 political economy'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물질적 '부'의 문제가 국가의 통치에서 핵심적인 사안으로 중요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경제'라는 개념의 유래를 길게 추적하면서 비교적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경제'라는 개념이 단순히 '희소성 속에서의 효율적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살림살이나 국가와 같은 사회적 관계의 관리와 연관되어 있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2. 역사 속 다른 경제 개념들을 찾아서

방금 살펴본 것처럼 경제가 단순한 효율성의 논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면 호혜경제 역시 이러한 측면들을 강조하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호혜경제라는 개념들을 발전시켜온 사람들의 논의들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증여경제, 선물경제 - 마르셀 모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고대 원시사회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증여경제' 혹은 '선물경제'라는 개념을 가장 먼저 제시한 사람 중의 한명입니다. 모스에 의하면 고대 원시 사회에서는 선물을 서로 주고 받는 증여제도가 발달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선물제도가 “자유롭고 공평무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제적이며 상당히 타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선물은 받으면 기쁘지만 '되돌려주는 답례의 의무감'으로 인해 불쾌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중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원시사회에서는 선물교환이 호혜성의 원리에 의해 선물을 줄 의무(증여), 받을 의무(수혜), 갚을 의무(답례)의 연쇄적 관계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선물교환 제도의 특징은 첫째로는 '교환'이라는 것이 시장 없이도 특정한 규칙과 계약을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며(선물을 받고도 답례를 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둘째로는 선물의 교환이 경제적 필요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유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라는 점입니다. 즉, 선물 교환이라는 경제 제도는 경제성과 도덕성이 함께 작동하는 제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르셀 모스는 선물교환과 같은 경제 제도는 법적인 제도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심지어 종교적인 제도, 한마디로 총제적인 제도라고 주장합니다.

2) 호혜, 재분배, 교환 - 칼 폴라니
  칼 폴라니 역시 20세기 초반의 경제학자로서
시장의 신화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론을 제시했던 학자 중 한 명입니다. 시장의 신화란 사회에서 인간 행위자 사이에 가장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상호작용은 시장의 교환이며, 국가나 시민사회는 이를 보완해주는 보조장치라고 보는 관점을 이야기 합니다. 그는 이러한 시장의 신화를 거부하며, 고대 사회에 대한 경제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역사적으로 경제에는 호혜(쿨라 교역), 재분배(포틀래치), 교환(시장)이라는 3가지 제도가 모두 존재해왔고 시장에서의 교환이라는 것은 오히려 예외적, 부수적인 것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현재와 같이 경제 원리에 의해 사회 전체가 재조직된 상황을 '경제에 파묻힌 embeded 사회'라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자유방임' 경제가 사실은 시장의 자율성이 아니라 '국가'의 계획과 폭력에 의해 사회 전체를 시장제도로 조직하는 과정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시장 자본주의는 아슬아슬한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국가기구를 통해 사회 전체를 시장의 자기조정에 순응시키려고 하는 경향과 또 하나는 사회 조직의 핵심을 지키기 위해 사회가 자기보호 강화하는 경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3)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 - 가라타니 고진
  가라타니 고진은 방금 이야기한 폴라니의 논의를 좀더 발전 시켜 자본주의가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보로메오의 매듭(세 개의 고리가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다 끊어지는 매듭)이라고 주장합니다. 자본이 상품교환과 화폐를 통한 교환형식이고 스테이트가 약탈-재분배라는 교환형식이며 네이션이 자본제가 파괴한 호혜적 관계에 기반한 교환형식이라고 할때  각각의 고유한 교환양식이 서로를 보완해주고 있는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이 세가지를 모두 극복하지 않고 하나만 극복하려고 하는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면 레닌주의는 강력한 스테이트로 자본주의를 타도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파시즘은 네이션으로 자본주의 극복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고진은 이 삼위일체(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교환원리로 어소시에이션을 주장합니다.
  그는 1990년대 말에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이라는 어소시에이션에 기반하는 생산자/소비자의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 운동은 지역통화의 개념을 활용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소시에이션이라는 새로운 교환양식을 작동시켜보고자 합니다. 즉, NAM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와 닮아 있지만 잉여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본의 교환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공동체의 교환원리인 상호부조와 유사하지만 배타적이지도 구속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호혜하고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운동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소비자와 소비자로서의 노동자가 연대하여 자본주의 밖의 생활의 지평을 만들어보려고 했습니다.
  고진은 이후에 <세계공화국>이라는 책에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변화시키려는 실천전략이 NAM과 같은 내부의 노력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지양하는 힘(“국가를 ‘위로부터’ 꼼짝 못하게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위로부터의 운동을 연계시키는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단하게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모스나 폴라니나 고진이 이야기하는 (호혜)경제는 약간씩의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호혜)경제를 효율성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서 바라본다는 점, 둘째는 역사 속에서 '시장' 혹은 시장원리가 자연발생적이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해왔던 양식들을 살펴볼 때 신화에 불과하다는 점을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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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명평화 작목반

 

경제? 문제는 호혜야!


loss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와 공유의 과정을 처절하게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웃으며 손짓하는 누더기 막장 자본주의에 홀려 은근슬쩍 휩쓸려 갈 것이다.



  호혜(互惠 mutual benefits) 그리고 호혜경제를 잠시 생각해 본다.

  예전에 클린턴이 아버지 부시를 이길 때 내걸어서 유명해진 선거구호가 생각난다. “It's the Economy, Stupid!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문제는 호혜야!

  


1. 호혜경제는 호혜 자체가 목적이자 의미


  동어반복은 아니다. 호혜경제는 경제가 아니라 호혜가 전부가 아니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허다한 수식어가 붙는 경제의 영역(이를테면 금융경제 실물경제 등등)과 동급으로 놓이는 호혜경제라면 뭔가 이상하다. 호혜경제란 아마도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사전에서 경제란,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라고 정의된다.

  이 일반적인 정의를 빌리자면, 호혜경제는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호혜적으로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호혜적인 사회적 관계>라고 하면 되나?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고 뭔가 어색한 이유인 즉, 생산-분배-소비활동을 호혜적으로 풀고, 사회적 관계를 호혜적으로 맺는다는 것, 그러니까 호혜하자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의미인지가 선뜻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경제>라고 할 때, 단순히 차가운 분석의 대상으로만 삼기 때문에 굳이 그 의미를 탐구하거나 실천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호혜경제를 이야기 하는 방식은 다른 것 같다. 호혜경제의 경우, 호혜는 대상이나 수단이 아닌 목적과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2. 호혜는 신뢰


  현재는 경제위기를 넘어 全자본주의적인 파탄을 코앞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제 와서는 너나없이 신뢰의 파국, 국가와 시장에 대한 불신을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늦었지만 반갑다. 이미 신뢰라고 부를 수 없는 모래위에 지은 집. 그것이 영광스러운 자본주의 승리와 영원한 성장 담론이었다. 다들 상식적으로는 알면서도, “정말 이게 유지되려나? 끝까지 가려나......?” 속으로만 물으면서, 너나없이 거품을 제조해왔다.

  그러면 이른바 <pie 키우기>라는 현대의 신화(神話)가 이제야 완전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과연 무엇이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허위인가, 생명인가?


  지구멸망 이후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을 기억하시는지. 살아남은 극소수들의 폭력성과 권력재구성에 회의하고 절망하는 영화들이 참 많다. 결국 시스템(그게 경제든 지구든)은 일부 혹은 폭삭 무너질지언정, 더 큰 파이를 추구했던 내재된 자본주의적 욕망과 그것을 획득하려는 폭력은 결코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지 싶다.


  호혜는 신뢰 자체, 신뢰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경제관계에서 신뢰의 회복을 위한 방식으로 채택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목적이다. 사회적 진리의 다른 표현에 가깝다. 신뢰가 깨진 자리에, 미봉책 또는 부분적인 모델로 호혜경제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들어서려면 호혜가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3. 호혜(互惠)의 신뢰 작동방식은 호손(互損)이다.


  사실 자본주의에 푹 젖어있는 우리들에게 경쟁력과 성장이란 단어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모든 육감(六感)을 자극한다. 그러면 조금 덜어내어서 경쟁력을 →호혜로, 성장을 →자립으로, 경제주체(생산-소비자)를 →공동체로 바꾸면 어떨까? 다소 무리한 연결인지는 알지만, 뭐 상당히 그럴듯하다. 더 매혹적이다.

  그러나 끝까지 물음을 밀고 가서 되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결국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작은 파이를 모자란 듯 기꺼이 나누게 될 것인가?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결국 작은 시스템을 만들어서? 잘 모르겠다.


  솔직하게 고백할 때인 듯하다. 호혜, mutual benefits은 또 다시 benefits의 달콤한 환상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협동하면 서로 이익을 누린다는 주장은, 동전의 한 면일 뿐이다.


 서로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것, 호손, mutual loss. (이런 표현이 있든 없든) 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지 싶다. 그러니까, 호혜를 말하는 순간, 호손 도한 호혜만큼의 비중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까먹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모두가 행복하고 편안하고 이익만 누릴 수 있는 길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고등학교 상업시간에 배운 바로는, 부채(debt)도 자산(property)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느 공동체이건 loss는 궁극적으로 자산이 된다. 그걸 지혜롭게 간직하느냐, 남 탓하다 마느냐, 뭐 그런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만일, 호혜경제를 논하면서, 또 습관적으로 benefits에 대해 기대를 건다면, 그게 스스로는 힘드니까 거버넌스니 사회적기업이니 하면서 테크닉에 의존한다면, 호손의 자산화는 커녕 결국 호혜도 물 건너 갈 듯하다.


  loss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와 공유의 과정을 처절하게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웃으며 손짓하는 누더기 막장 자본주의에 홀려 은근슬쩍 휩쓸려 갈 것이다.



4. 호혜와 호손, 마음 덜기


  예수의 비유가 하나 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데려오는데, 새벽에 몇 명 낮에 몇 명 오후 5시 해질 무렵에 몇 명을 데려왔다. 주인은 6시에 모두에게 똑같은 급여를 주었다. 다음은 성서 인용이다. 나름대로 유명한, 첫째와 꼴찌 비유이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당시 노동자 일당)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장)


  이 비유에 비유하자면, 이 상황에서 호혜는 성취되었다. 누구나 이익을 보았다. 문제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이다. 상대적으로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노고에 비해서 말이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사정 어려운 옆집 사람이라고 해도, 비합리적인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들의 합리성은 공동체성을 넘어서 있는 무엇이다. 5시에 온 사람들은 어떨까? 앗싸, 땡 잡았다? 성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도 새벽부터 일 했으면, 똑같이 반응했으리라.


  따라서, 호혜와 호손을 함께 성취하는 유일한 길은 아마도,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불필요한 마음을 더는 무엇일 것이다.


  공동체를 벗어나면, 첫째가 꼴찌로 전락한다. 꼴찌도 첫째를 노린다. 대표적으로 자본주의가 그렇다. 개인의 주체적인 경제활동이란, 사실 따뜻한 공동체 바깥의 무한경쟁을 의미한다.

  반면에 공동체 안에서는 그저 하루의 생존이 함께 해결된다. 손해 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습관적으로는 명백한 개인의 손해로 보이더라도, 모두 호혜와 호손을 통해 공동체적 자산으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믿을만한 공동체 안에서만 욕심을 줄일 수 있고, 욕심을 줄여야만 공동체가 믿을만하게 유지될 수 있다. 호혜와 호손은 그 안에서 어쩌면 성취될 수도 있지 싶다.

  


5. 귀농과 호혜


  ① 착한 귀농자들이 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했으며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農과 땅심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고 있다. 문제는 그 손해를 나누어 짐으로써 미래를 지탱하려는 공동체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수완이 있는 사람은 회원제 직거래로, 지역 조건에 따라 어떤 사람은 한살림 생산자로 공동체에 기댄다. “여러분, 귀농자를 각별히 챙겨주세요”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우리 주변에는 그들보다 백배는 더 챙겨야 할 사람이 많다. 다만, 도시와 농촌의, 조직과 개인의 접점은 있지 싶다.


  ② 착하게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귀촌이든 뭐든 농촌으로 가서 사는 것이 道에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경쟁이나 허장성세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쉽게 타협하고 절망하게 되는 지점이, 농촌에서도 여전히 상존하는 성장과 경쟁이다. 대안적 삶의 방식은 여러 선택이 가능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호혜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을 얻고 싶어 하면서 주고 싶어 한다. (호혜 운운하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 그 틈새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을까? 관습적인 타협의 방식 말고, 다소 로맨틱한 진정성으로 말이다. 그들이 단 몇 명이라도 말이다. 이 사람들은 보기보다 어리숙하지는 않다. 마치 예수에게 기적을 요구하던 유대사람들처럼, 그저 확신과 동력을 원하고 있다. 공동체와 신뢰를 제시할 수 있을까? 그 접점도 역시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앞선 사람들이 솔직할 수 있으면 말이다.

 


6. 호혜, 있기는 있을까?


  호혜는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이론도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급식운동에 있어서 운동 이전에, 우리 마을 아이들이기에 내 쌀을 그냥 무상으로라도 먹이는 마음. 그 언저리에 있지 싶다. 그런데 그런 호혜의 마음이 우리 곁에 있기는 있나?


  도덕경의 한 구절.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시위천지근 면면약존 용지불근) 이것은 천지의 뿌리와도 같은 것이지만 그 이어짐이 실낱같이 가늘어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듯이 존재하며, 막상 써먹으려고 하면 의외로 뜻대로 잘 되지는 않는다.


  호혜는 있는지 없는지 가물가물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유행처럼 경제 논쟁에 열 올리기보다는 차분히 호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계속 하다보면 공감이 생기고 쌓여서 길이 엿보이지 않으려나? 호혜든 호손이든, 면면약존! 다시 말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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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ftsky
 

가을의 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글로벌 경제/생태위기, 다시 전환의 기획을 생각한다1


                                                                                                                            주요섭

바람이 차가워지고 가을이 깊어갑니다.

‘가을의 시대’, 언젠가 어느 글에서 썼던 이야기인데, 한마디로 화려한 ‘성장(盛裝)의 시대’를 지나 꽃도 잎사귀도 떨구고 ‘씨알’ 오롯이 영그는 ‘열매의 시대’가 왔다는 말입니다.(나고 자라고 쇠하고 사라지는, 어김없는 생장소멸의 생명순환 과정입니다.)


경제위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경제 때문에 잠시 잊었지만, 생태위기는 정말 치명적입니다. '경제공황'은 정말 새발의 피가 될 생태재앙(환경/생물학적 재앙)으로 인한, ‘생명공황’이 정말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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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시대

파국적 상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태계와 경제체제,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의 대전환기라는 말입니다. 지금 지구문명사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후천개벽도 같은 말입니다. 우주의 가을이 왔다는 말입니다.


성장의 시대에서 내면(영성, 지성, 감성)이 단단하게 아름다워지는 씨알의 시대로. 당연히 장경제는 부적절합니다. 소비와 생산의 축소는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대신 생태계를 복원하고 강퍅해진 영혼을 되살리고, 이웃과의 관계, 즉 공동체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깊게 공부하고 아름답게 자기실현하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전환의 기획? 이게 큰 방향이겠지요. 세계관의 전환, 생활양식의 전환, 체제의 전환.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이미 세계는 대전환기에 들어섰습니다. ‘2MB와 아이들’은 변화하는 세계를 붙잡고 싶어 하지만,그것은 거꾸로 흐르는 강물처럼 역행, 역천(逆天)입니다. 이미 흘러간 유행가가 되어버린 ‘성장의 전설’에 사로잡힌 미숙아들 같습니다.


三少三美의 생활운동과 생명평화의 정치경제학


특별히 생명운동은 아마도 이미 펼쳐왔던 세계관 및 생활양식의 전환을 전면적인 사회적인 의제로 제기하면서, 체제의 전환을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의 기준으로써 ‘3S운동’(Small, Slow, Soft, +Smart?)이나 ‘三少三美운동’(적게 벌고 적게 쓰고 적게 버리는 三少. 또한 아름답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행동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三美)을 대중적으로 펼치거나, 문화예술교육을 기획하고, 농업적 삶, 지역적 삶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컨대 생계형 귀농이 예상되는 오늘, 단순히 일자리나 호구지책을 넘어 가을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해내야 하지 않을까요.


체제의 전환을 기획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미 이야기는 모아집니다. 녹색평론도 수유너머도 문화과학도 강수돌님이나 우석훈님도 모아집니다. 국가와 시장, 사이 혹은 너머의 시민사회, 공동체, 코뮌, 어소시에이션, 제3부문, 사회적 경제 등등. <사회/공동체=호혜>의 전망속에 <국가=재분배>를 활용하고, 투전판 같은 <시장=교환>을 투명하게 만드는 비자본주의의 길. 혹은 관계성, 다양성, 순환성, 그리고 창조성이 실현되는 생명(질서)의 길. 교환과 재분배와 호혜가 기우뚱한 균형을 이루는 平和(균형과 조화)의 길. 표현이 다르고 생각의 경로가 다르지만, 방향은 하나인 듯합니다. 생명평화의 정치경제학.


예컨대 이런 것, ‘사회적 안전망’은 국가를 통해 만들어지지만, 사실상 ‘국가적 안전망’이긴 하지만, 공동체가 붕괴된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안전망은 부재합니다.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적 안전망의 구축. 이런 것이 체제 전환의 기획일 듯합니다. 이것은 사회운동이면서 동시에 지방 수준의 정치가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재분배를 위해서는 중앙정치도 필요합니다. 시장도 유의해야 합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출간된 어떤 책에 따르면, 북한의 극심한 식량위기를 완충시키는 것은 계획경제(배급체제)가 아니라, 지역마다 열리고 있는 (교환)시장이라고 합니다. 시장이 가장 탁월한 ‘경제적 자기조직화(자연경제)’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호혜경제네트워크와 생명민회, 그리고 ...


그렇다면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역에 내려가고, 농사지을 준비를 해야 할까요? 물론 아닙니다. 궁리(窮理) 중입니다. ‘삼소삼미운동’과 ‘호혜경제네트워크’, 그리고 ‘생명민회’를 열쇠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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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왠지 생각에 잠겨보지도 않은 채 덜컥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
의 도리가 아니라는 말투였다. 듣는 사람에 따라, 또 새겨듣기에 따라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러움이 복받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런
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감정에 사로잡혔
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럽지 않고, 대신


외로웠다.

 

--- 박민규,「갑을고시원 체류기」(『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



1.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고시원에서 몇 개월 살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아니면 자기 몸하나 누일 곳 없는 지방에서 올라온 취업준비생이나 시급으로 살아
가는 아르바이트생들의 절박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저 일과 논문을
병행하기 위해 시간을 좀 절약해보려고 집을 놔두고 직장 근처 고시원에 방을 잡
았을 뿐이었다. 1평 남짓한 작은 방은 침대 하나와 그 옆에 작은 책상과 의자를 놓
으면 손님 한명조차 들어올 수 없는 숨막히는 곳이었다. 밤에는 노트북으로 논문을
두드리고 아침에 다시 눈을 뜰때마다 어서 이곳에서 나가야 할텐데라는 생각만 되
풀이했다.

한 후배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공부를 위해서 잠시 집 놔두고 들어온
인간들이랑 정말 갈 데가 없어 이곳으로 들어온 인간의 차이가 뭔지 알아요? 잠깐
들어온 이들은 절대 이불을 빨지 않아요. 왜? 잠깐 덮고 지내다가 그냥 버리고 가
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계속 살아야 이에게 그 이불은 영원히 내 이불인거죠. 그
래서 자꾸 자꾸 빨아요." 그랬다. 그곳에 있는 동안 단 한번도 이불을 빤 적이 없었
다. 나는 그저 잠시 스쳐가는 사람일 뿐이었으니까. 몇일 전에 고시원에서 일어난
참사 뉴스를 들었을 때도 아무런 위로를 표할 길이 없었다. 그들 앞에서 고시원에
3개월 살았던 일들 잠시 추억한다는 것은 사치, 아니면 모욕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2. 한번은 친구의 고시원을 잡아주기 위해 안산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예
전에 집을 잡던 경험들을 상기하여 엄청난 발품을 팔아야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후
보지를 샅샅이 물색해서 몇군데 부동산의 목록들을 정리해서 내려갔다. 그러나 처
음 들어간 부동산에서 나는 내가 한참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 근처로
마치 격자무늬처럼 세워져있는 고시원들은 각각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모든 부동산
들이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고 있어서 몇가지 조건만 입력하면 바로바로 방이 나왔
던 것이었다. 욕실은? 창문은? 옵션들은? 그리고 우리는 차를 타고다니며 그집들을
구경했다.

"요즘 부동산이 데이터베이스가 너무 잘되어 있네요."
"아, 네. 여기는 그래서 여러군데 다닐 필요가 전혀 없어요.
필요한 조건만 이야기해주시면 바로 매물을 찾을 수 있어요."

"매물이 자주 나오나 보네요?"
"사람들이 계속 방을 옮기니까요. 보증금 없이 월세 30만원에서 몇달 살다가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으로 옮기고 그런 식으로 계속 옮기는거죠."
"이런 고시원 주인들은 보통 어떤 사람들이에요?"
"음.. 주로 사모님들이 많더라구요. 교수들도 있고. 생각해보면 이런 건물 하나
세워서 빽빽하게 방만들어 넣고 관리인 한명 사서 두면 서울에서야 가끔 와보면
되고 한달에 300-400은 꼬박꼬박 들어오니까요. 학생도 나중에 돈 벌려면 이런
임대사업 해봐요."


그때 몇군데 집을 구경하러 돌아다니면서 그 동산업자는 쉴새없이 그 동네에서
파노라마처럼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결국 친구의 마음에
드는 월 30짜리 집을 하나 찾았고 그 친구는 반년 후에 그 동네를 떠났다.



3. 몇 년 뒤에 한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축하모임에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서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처음 보는 신부를 소개받은 뒤 예쁘게
인쇄된 청첩장을 건네받았다. 우리는 축의금 대신에 친구에게 뭘 해줄까 고민하
다가 돈을 모아 친구 집에 냉장고를 한대 들여주기로 했다. 대기업에 다니던 한
친구는 직원가로 사면 훨씬 싸게 살 수 있다며 자기가 주문을 넣기로 했다. 그렇
게 한껏 부풀어 오른 분위기 속에서 한 친구가 스스로 총무의 역할을 떠맡기로
결정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안건이 끝났다.
 
그 뒤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 직장
인들 사이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주식얘기, 재테크 얘기들이 오가면서 어떤 친
구한테서 부동산 임대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제법 짭짤하다는 그 친구의 얘
기에 다른 친구들은 솔깃해했고 법원경매로 나오는 부동산 매물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한 선배가 자기 집을 5층 원룸으로 재건축해서 올린 뒤에 부자가 되었다
던지, 구청에서 임대 사업 관련으로 무료교육을 시행하고 있다던지, 건국대에 생
긴 부동산학과에 대한 이야기까지 정보들이 줄줄 쏟아져나왔다. 결론은 역시 한국
에서 돈을 벌려면 '부동산!'이었던 것이다. 나는 별 말 없이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
다가 집으로 돌아와 친구의 냉장고 비용을 총무 통장으로 보냈다.



4. 몇 일 전에 고시원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언론에서는 재빠르게도 고시원이 소방
안전의 사각지대라며 호들갑을 떨어대고, 고시원과 같은 21세기형 쪽방에 수많은
청춘들의 꿈이 저당잡혀 있다고 한탄하며 20대들의 주거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기
사들을 내보내고, 이제 지겹지도 않은지 범인이 어릴 때부터 핍박을 받아서 반사회
적 인성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이코드라마를 반복해서 써대고 있었다. 나는 그 많은
기사들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김수영은 혁명이 안되자 방만 바꾸고는 실망의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그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알았다고 하지만 그 고시원에서 죽어갔던 그녀들에
게는 그 가벼움은 역사가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사람들이 살아왔
고 살아가는, 역사를 공유하는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런 특징이 없
는 빈터인 '공간',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 아무런 불편없이 사람들을 대체 가능한
그런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고시원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오직 그 고시원을 '벗어나기' 위해 그곳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또는 추위에는 떨고 여름에는 푹
푹 찌는 옥탑방에서 창문이 있는 방으로, 화장실이 있는 방으로, 창문을 열 수 있는
방으로 옮겨갈 뿐이다. 언젠가는 그 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젠가는 그 방을 다시
아련히 추억하기 위해서.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라는 연민에 가득찬, 그러나
모욕적인, 때로는 외로운 질문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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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5 <화쟁> - 생명평화운동의 역사 공부



1. 지난 10월 15일부터 '화쟁'에서는 '생명평화운동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생명평화운동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생각해보기 위해 이전의 생명평화운동의 역사를 한번 정리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며 또 유익할 것 같다는 점에 많은 분들이 동의를 표하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귀농, 생협, 불교, 기독교 등의 분야별로 생명평화운동의 역사를 정리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이번 화쟁 모임에는 김정지현, 오은영, 이규원, 이진천, 이근행, 주요섭, 정규호님이 참석하셨고, 모심과 살림 연구소의 윤형근님을 강사로 초빙하여 유영모, 함석헌 선생부터 <녹색평론>에 이르기까지 생명평화운동의 전사에 해당하는 부분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윤형근님께서 생명평화운동의 역사를 워낙 간명하게 잘 설명해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강연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강연의 내용을 요약해서 설명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2008/10/14 - [공부방/자료스크랩] - 한국적 환경/생태담론으로서 생명사상의 흐름


3. 그래서 이번 화쟁 모임에 대한 리포트는 강연 내용을 전부 정리하기보다는 제 개인적인 느낌들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는 것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저로써는 생명평화운동의 역사를 이렇게 정리된 내용으로 배우는 기회가 처음이라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물론 다른 분들도 이런 내용들을 부분적으로 정리하는 기회는 있었지만 이렇게 한번에 정리해보는 기회는 처음이라고 말씀하기는 하셨습니다). 윤형근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람들을 생명평화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좀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는 유영모, 함석헌 선생과 같은 분들은 토착화 신학이라는 맥락에서 처음으로 접했었고, 윤노빈 선생은 월북한 철학자라는 분단상황의 상징으로, 프란츠 파농은 탈식민주의의 선구자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어떤 면에서는 생명운동의 단초들을 제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제 기존의 이해를 바꾸게 하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4.
윤형근님의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도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생명운동은 당파적인 운동이다'라는, 즉 생명운동이 항상 시대불변적으로 정당한 운동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과 배경 속에서 나타난 운동이라는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동안 생명운동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생명운동은 '생명의 가치'라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속성을 자신의 주장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왔었습니다. 물론 보편적인 가치들은 존재합니다. 생명 뿐만 아니라 자유, 평등, 해방과 같은 가치들 역시 보편적인 가치들이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가치들이 운동의 차원에서 혹은 담론의 층위에서 제기될 때에는 분명히 어떤 맥락과 배경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는 시한이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5. '개성'이라는 가치를 예로 들어봅시다. 지난 70-80년대 한국은 근대화 과정 속에서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을 시행해왔습니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태지의 '교실이데아'로 상징되는, 그러한 교육이 학생들의 '개성'을 죽이고 획일화해왔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좀더 학생들의 개성을 살려낼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담론들이 융성하기 시작했지요. 물론 이는 모든 아이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개성들을 꽃피울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교육운동이 지난 10여년간 이루어낸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처럼 '개성'이라는 가치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인 가치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적인 맥락에서는 비판으로서 분명한 시한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6. 현재 2008년도라는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시다. 요즘 학생들이 '개성'을 살려야 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재 개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래야 하는 '윤리'에 오히려 가깝습니다. 기업들은 더이상 근면하고 성실한 인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끼가 넘치는' '튀는' 인재들을 원합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이제 공부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잘 놀 줄도 알아야하고, 남들과는 다른 무엇을 갖추어야만 하며 심지어 초등학생 때부터 '창의력' 학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한국에서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획일화의 폭력들은, 개성을 죽이는 구습들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전히 두발, 교복, 일제고사와 같은 문제들이 항존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7.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성'이 여전히 보편적 가치로서 문제제기를 무조건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냐고 평가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개성'이라는 언어를 이미 자본주의가 탈취해서 자신들을 것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현재 '개성'을 가장 강조하고 찬미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블루오션' '혁신' '창조성'과 같은 단어들이 가장 남발되는 것은 오히려 CEO들의 책이 아닐까요? 우리가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과 같은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회사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가 자유분방한 복장에 마치 실험실처럼 꾸며놓은 개성 넘치는 사무실이라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요? 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전히 아무런 맥락 없이 '개성'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는 것("우리 아이들이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들어주어야지요!")은, 그러한 '개성'을 또다른 자본 창출의 원천으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8.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사실 제대로 본론은 아직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말이지요. 저는 앞서 설명드린 이러한 이야기를 '생명'이라는 가치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생명'이라는 가치를 우리가 언제나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편안하고도 변치 않는, 항상 우리에게 비판과 대안의 원천이 되는 그러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생명'이라는 가치가 갖고 있는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화'되는 맥락 속에서 운동이나 담론으로서 나타날 때는 분명히 그 가치가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의 시효가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윤형근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운동의 '당파성'을 이러한 의미로 이해했고 그점에서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다 못한 남은 이야기는 다음 번에 생명평화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또 한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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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키리냐가

                           '신용공황'의 정체, ‘생장소멸’의 경제학

-글로벌금융위기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



난리가 났습니다. 다른 수사를 발견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어제 오늘 다소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연일 경제기사의 타이틀은 ‘패닉’, ‘패닉’이란 말뿐이었습니다. 돈이 되는 곳이면 지옥에라도 달려갔던 ‘투기자본’(Investment Bank)과 그의 프렌드(정부)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의 몰락, 금융자본주의의 붕괴, 자본의 세계화의 후과 등을 거론하나 필자는 사실 경제를 잘 모릅니다. 다만 최근의 공포와 불신의 연쇄폭발은 세상의 이치로 보아 필연적이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선 주식이든 펀드든 선물이든 파생상품이든, 이것은 돈 놓고 돈 먹는 투전판이나 화투의 끗발을 겨루는 ‘섰다판’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화 ‘타짜’가 가르쳐준 것처럼 도박판에서는 ‘아무도 믿을 놈이 없다’는 것을 몰랐단 말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크레딧(credit), 즉 신용(信用)이란 탐욕과 불신의 ‘현상유지(status qua)’일 뿐, 월스트리트와 금융시장에 믿음과 신뢰는 애당초 없었다는 것입니다. 신용위기는 시한폭탄이었다는 말입니다. 시장지상주의는 오히려 이를 부추겨 뇌관역할을 했고요.


  어렸을 적 화물기차에서의 화투판이 떠오릅니다. 어쩌다 타게 된 완행열차의 화물칸. 논두렁 건달들 몇이 모여 사과궤짝 위에 판을 만들어 화투를 칩니다. 지폐와 고성이 오가며 판이 무르익을 즈음 갑자기 열차 안이 컴컴해졌습니다. 터널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객차가 아닌 화물차에는 조명등이 없었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이내 난리가 났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내 돈 내 돈” 하며 ‘패닉’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다시 열차 안이 밝아졌습니다. 하지만 이미 상황종료, 회복불능, 화투장과 동전과 지폐가 어지럽게 널려있습니다. 상대를 탓하며 욕설이 난무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가 더욱 근본적입니다. 돈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섭게 비대해질 수 있을까요? 돈은 이자를 먹고 자랍니다. 어떤 돈은 많은 이자를 먹어 더욱 빨리 자라고 어떤 돈은 조금 늦게 자라기도 합니다. 욕심을 내다 꺼꾸러지는 돈도 자주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은 예외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에는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 즉 ‘무한성장경제’입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쇠하고 사라지는, 돈에도 생장소멸(生長消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모든 생명은 시간과 함께 늙어갑니다. 물건들도 낡아갑니다. 그런데 돈은 낡지도 늙지도 않습니다. 가만히 은행금고에 누워있어도 계속 부풀어 오릅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풍선처럼 터지는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 아닐까요?


  20세기 초반 유럽의 실비오 게젤이라는 사람이 창안했다는 ‘노화하는 돈(Aging Money)’이 생각납니다. 돈에도 생장소멸이 있답니다. 돈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가상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게젤이 ‘자유화폐’라고 이름 붙인 그 돈에는 마이너스 이자가 붙습니다. 안 쓰고 가지고 있으면 새 물건이 낡듯이 가치가 조금씩 줄어듭니다. 그러니 얼른 소통을 시켜야합니다. 때문에 순환율이 높아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자연 사이에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순환성, 관계성의 경제학. 바로 생명과정의 본성입니다.


  1930년대 세계 경제공황 시절 미국을 비롯해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자유화폐’의 개념을 빌린 다양한 지역통화들이 경제시스템 붕괴의 실질적인 대안으로 실험되었고 실질적인 효과가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화폐시스템을 독점하려는 중앙정부에 의해 모두 저지되었지만.


  달러경제의 붕괴, 혹은 글로벌 경제공황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이즈음, ‘무한성장 경제학’의 신화에서 벗어나 ‘돈과 경제의 생장소멸’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삶/생명 경제학’의 소박한 시작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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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공황은 필연, 사랑의 패러다임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시대, 故 백기범 선생님을 떠올리며



글로벌 금융위기의 쓰나미가 공황적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오늘,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백기범 선생님. 지난 초봄에 뵈었는데 어느 날 부고가 날라왔다. 그리고 몇몇 선배 후배와 빈소를 찾았다. 올 여름일이다. 기사를 찾아보니 7월 7일에 돌아가셨다.


백기범 선생님. 70년대 조선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현대건설에서 호구를 했고 문화일보 창간 후 편집국장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이후 잠시 시민의신문의 주필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말지를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병중에도 뵐 때마다 정말로 대단한 ‘포스’를 느끼게 해주셨다. 초록정치연대 사무실에 모셨을 때도, 일산에 찾아가 뵈었을 때도 선생님의 열정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사이버 초록나라’ 사이트를 당장 구축하자셨고, 강원도 백두대간에 몸과 마음을 닦는 ‘하늘 길’을 열자고도 하셨다. 또한 ‘영성정치’를 강조하면서 근대정치의 유물인 정당정치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초록당’도 마찬가지.


요즈음 특별히 백기범 선생님이 생각나는 것은 마치 예언처럼 달러경제의 붕괴를 단언했기 때문이다. ‘생산과잉-유통과잉-소비과잉-환경파괴-자원고갈’ 이라는 악순환 고리, 하루 1조 달러의 세계적인 허순환(虛循環) 구조 등등. ‘허순환’이란, 물론 재화의 생산이나 무역 같은 실물경제와는 관계가 없는 숫자상의 돈놀이라는 것. 요컨대 ‘적의 부재’와 ‘과잉’으로 공황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마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모여들고는 있지만 정작 비는 내리지 않는 것처럼, 국경이라는 틀이 없어져서 과잉이 세계를 덮는 공황으로 폭발할 집중력을 아직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노름판에서 한 사람이 판돈을 다 따면 판이 계속될 수 없는 것과 이치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경제공황과 환경대재항은 문명사적인 맥락에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의 계기가 된다고 본다. 세계화도 마찬가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구조적인 경제위기에 대한 자본가들 나름의 대응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일찍이 떼이야르 샤르뎅이 말한 ‘인간의 세계화’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또한 환경재앙도 전쟁을 대신한 인류의 적(敵), 곧 해결과제가 되었지만, 이는 증오 대신 사랑으로만 막을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도전이라는 점에서 문명의 전환은 이미 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선생님의 글을 다시 꺼내 읽는다. 혹 살아계셨다면 어떤 작금의 사태를 보고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선생님의 통찰력과 혜안이 아쉽다.


“생명이란 우주의 자기조직화이며 따라서 나는 내가 아니라 우주의 발현”이라고 깨닫고 믿고 계셨으니 아마도 이 시간에도 은은하게 우주를 활보하고 계실 것이다.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선생님의 생각을 정리한 ‘사이버코리아닷컴’이라는 팜플렛을 공부방에 올린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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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패닉’, 생명은 있다

- 투전판에서 빠져나오면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미국식 금융, 종말 오나” “미경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한계 노출” 어느 신문의 경제면 타이틀이다. 9월 16일자였으니 벌써 1달 가까이 지난 셈이다. 기사가 이렇게 이어진다.


“투자은행을 선봉 부대로 하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전성시대가 막을 내리는가. 지난 3월 베어스턴스에 이은 메릴린치와 리먼브러더스의 몰락은 완벽한 ‘부(富)의 창출시스템’으로 숭앙되어 온 미국형 자유방임적 금융자본주의의 결함을 여실힌 드러냈다. 거대 투자은행들의 말로는 브레이크 없는 ‘돈의 질주’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신문은 대한민국, 아니 한국자본주의 지킴이 조선일보였다. 그리고 2008년 10월 10일, 모든 매체의 타이틀은 ‘패닉’ ‘패닉’이다. 금융에서 실물로, 미국에서 유럽과 아시아로, 공황적 공포는 이제 현실이 되어 글로벌 경제를 나락에 빠뜨리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종언인가? 성장경제의 몰락인가?


그렇다면 쓰나미 같은 글로벌 경제의 붕괴는 ‘미국식 금융시스템’의 몰락인가, ‘레이건/대처의 신자유주의’의 조종인가, ‘달러경제’의 붕괴인가, ‘자본주의 성장/약탈 경제’의 종말인가.


적어도 월스트리트 시스템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최소한 레이건/대처 패러다임, 즉 케인즈 패러다임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처방의 몰락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좌우를 떠나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문제는 오늘의 사태가 여기서 더 나아가, 2차 세계대전 이후 강고하게 관철된 기축통화 ‘달러’를 중심으로 한 경제/정치/문화적 팍스아메리카나의 종언을 예고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 발 더 나간다면, 자본주의적 무한 성장/약탈 경제의 종말을 시사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잘 모르겠다. 그런 저런 생각이 드는 것일 뿐.


논자들의 대체적인 합의점은 금융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는 이제 끝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거슬러 올라가면 1929년 대공황이후 미국과 서유럽은 케인즈주의적 해법을 통해 2차세계대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정치적으로는 사민주의/복지국가 노선와 맞물리면서 대량생산/대량소비 시스템과 함께 안정적인 성장체제를 구축하였다. 자본도 노동도 지구 남반구의 생태계와 삶을 집중적으로 파괴 약탈하면서 성장의 수혜자로 공생했다.


그렇다면, 29년 대공황 이후 73년 석유위기로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한 안정성장체제 및 복지국가의 위기, 그리고, 1980년 전후 자본의 또 다른 선택이었던 신자유주의의 성공신화(소비에트체제의 붕괴라는 승리의 면류관을 포함하여)와 몰락, 즉 또 다른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벌써 ‘국가의 귀환’?


그런데 어떤 논자는 벌써 ‘국가의 귀환’이다. ‘시장의 실패’에 대한 해법은 바른 정부의 개입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런데 또 다른 많은 논자들이 고개를 흔든다. 케인즈주의의 한계와 계획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이미 증명된 것인데 되돌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옛 소련은 접어두고서라도 서유럽 사민주의의 분배/소비의 경제학마저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서유럽이 신자유주의로 넘어간 것은 자연스러운 경로였고. 그러나 적어도 아직은 답이 없다.


미국 정부가 은행을 국유화할 수도 있단다.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며 한때 세계1위 자동차기업으로 군림해온 GM마저도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대규모 제조업체도 국영화가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정말 국가의 귀환이 현실화될 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의 산업은행 팔고, 대우조선 팔고, 거꾸로?


문제는 그게 아니다. 팔거나 사거나 간에 이미 ‘자본주의 성장경제’ 하에 국가는 ‘성장국가’ 모델의 외피를 쓴 ‘기업국가’이거나 ‘자본국가’라면 어찌 할 것인가? 중국 공산당정부는 또 다른 성장동력을 창출하기 위해 농지의 사유화로 농촌을 자본주의화 하려 한다고 한다. 국가는 경기장의 심판이면서 구단주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정부는 항상,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살고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세금을 많이 내야 복지수요를 감당하고 등등 국민들을 달랜다. 어떤 답을 낼 수 있을까.


삶이 먼저, 투전장에서 나와야 다른 세계가 보인다


그렇다면 또 다른 대안 운운 하며 협동조합, 제3부문, 사회적 경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전에 더욱 중요한 것은 진짜로 ‘생명’이다.


환율이 폭등하고 주식이 폭락해도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성장경제’는 몰락해도 공동체는 쉬 해체되지 않는다. 단 조건이 있다. 도박판에서 털고 나와야 한다. 영화 ‘타짜’가 가르쳐주었듯 돈 먹고 돈 먹는 투전장, 도박판에서는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 ‘신뢰의 위기’는 처음부터 없었다. 신뢰 자체가 없었으니까. 도박판에서 신용(信用), 믿음이라니. 몰랐나. ‘보이지 않는 손(사실은 物神)’이 심판을 보다가, 정부로 심판을 바꾼다고 믿음이 생길까. 어차피 도박판은 도박판인데.


담배연기 가득차고 어두침침한 도박판에서 빠져나오면 세상은 환하고 돈 좀 없어도 여전히 살만하다. 패닉, 공황, 나락에도 두려워 할 일이 아니다.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아니 이게 원래 있었던 진짜 세계, 생명세계, 삶의 세계다.(국가와 자본도 다르게 보인다.)


사람들의 숨결과 체온은 여전히 살아있고 나눠 먹고 줄여 먹으면 밥 세 끼 밥 굶을 일도 없다. 民이라는 잡초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아있다. 사실은 “생명이 먼저다” 일 필요도 없다. 원래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터이니까. 순환하면서.


※추신1: 애초에 글을 시작할 때는 ‘국가의 귀환’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생명평화운동의 무기력을 동시에 비판하려 하였다. 그런데 글을 쓰다가 뉴스를 보면서 글이 자기 맘대로 가버렸다. 어쩌면 답은 뻔하다. ‘공명’식으로 말하면 ‘共세상’의 전망 속에 ‘公’의 역할을 높여 가는 것. 경제의 사회적/공동체로의 통합. 그 구체적인 방안은 民의 자율, 共, 호혜, 사회적 경제, 제3부문, 공동체 등일 것이다.(그 뒤에 경제만 붙이면 된다.) 국가와 시장 사이 혹은 너머. 非자본주의, 非성장경제의 길이다.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한 것이지.


※추신2: 22일 김영호 선생님을 모시고 ‘경제위기와 생명평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어 너무 기쁘다. 기대가 된다. 더불어 ‘생명평화운동 단체’라고 하는 데들이 모여서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다. ‘생명평화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생명평화의 정치경제학’을 내놓고 이야기하고 실행하고 위기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방안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당장 사람들이 먹고 살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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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론의 위기, 파국론의 파국(2)

- 초록이의 눈(4)  



앞 글에서 계속


3. 어? 2012년에 무슨 일이?


정신과학의 영역에 대해서는 제가 상당히 무지합니다만, 그게 생명운동과 그리 멀지 않은 동네인 것 같다는 인상은 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경계하고 때로 일부는 혐오하기 조차하는 분야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넓게 그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인지 아닌지 몰라도, 2012년이 자꾸 회자되길래, 대체 뭔지 궁금했더랬습니다. 그래서 찾아보았습니다.


올해 봄에 <미내사클럽>의 격월간지 <지금 여기>의 별책 제목이 <2012년 대전환>입니다. 웹에서 목차는 확인했습니다만, 책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목차로만 보면, 태양계와 행상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면서 지축이 이동될 가능성도 높다는... 그런 내용 같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2012를 검색해보니, 마야문명이 남긴 정확하기 짝이 없는 시계가 2012년에 끝난다는 이야기가 많이 뜹니다. <World Shock 2012>라는 책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한다는군요. 거기에다 노스트라다무스(이 사람 참... 질기다!)가 사실은 2012년에 지구멸망을 예언했다든지, 무슨 고성능 예측 프로그램(이름이 ‘웹봇’이랍니다)을 돌렸더니 2012년에 파국을 예측했다든지, 주역(周易)도 2012년 대변혁을 말하고 있다든지(주역이 정말? 주역은 모든 나날의 변혁을 얘기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여러 주장들이 혼재되어 있는 듯합니다. 이걸 히스토리채널이 정리해서 방영한 것 같군요. 그래서 더 이러나 싶기도 하구요.

<World Shock 2012>이란 책의 출판사 홍보 카피를 보니, 이렇습니다. “인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어떤 책으로도 풀리지 않던 갈증, 당신의 그 궁극적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답!” 


아...........! 궁극의 해답이라고요?
역시 그렇군요. 역시 그랬군요. 역시 사기였군요.


소결론으로, 이런 파국론 자체에 대해서는, 논할 가치는 전혀 없겠습니다. 저는 뭔가 의미 있는 구석이 있나 했습니다. 1992년 휴거를 주장한 기독교 광신도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허접한 영역에서조차도, 함께 생각해 볼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바로 <통찰>에 관한 문제입니다.



 


4. 위기와 파국의 통찰(?)


통찰(洞察) [명사] insight / 유의어 = 통견(洞見) 통관(洞觀)

          1.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봄

          2. <심리>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 장면의 의미를 재조직화함으로써 갑작스럽게 문제를 해결함. 또는 그런 과정. 쾰러는 학습이 시행착오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보았다. (국어사전)



사전적으로는, 사물과 사건을 꿰뚫어 보는 과정과 결과를 통찰이라 부르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생명운동에 있어 <통찰>이 거의 전부가 아닌가 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으로 무엇을 꿰뚫어 보는가? 다름 아닌 <생명>이라서 생명운동이겠습니다.


통찰은 다른 것으로도 가능한 듯합니다. 노동과 계급의 관점으로 꿰뚫어 보는 노동운동도 가능합니다. 환경-지역-귀농이든 뭐든, 대개의 운동을 수식하는 그 단어가, 꿰뚫어 보는 도구이자 경로이자 돋보기이자 망원경이지 싶습니다.


우선, 위기에 대한 통찰을 생각해봅니다. 먼저 묻고 싶습니다. 남들은 전혀 catch하지 못하는 반면에 홀로 번득이는 예지로 catch하는, 그런 식의 위기에 대한 통찰이란 가능합니까?

석유의존-석유문명의 위기는 영민한 고등학생 정도만 되어도 통찰 가능합니다. 지구환경의 위기는 농부들이 먼저 감응합니다. 어떤 언어로 표현하며, 어떤 논거를 대며, 어떤 해법을 제시하는가에 통찰의 저작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직감적인 통찰은 생명이 있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위기에 대한 통찰은 절대로, 동시대에 오로지 그(녀)만이 가질 수는 없는, 이미 보편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 이를 어쩌나...... 정말 그러면 큰일인데......” 민초들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이내 다시 고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통찰은 이미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위기론은, 그 통찰을 전문가적 양식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포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위기에 대해서 체계적인 논거를 댄다는 것은 전문가들의 역량이고, 그 나름대로 시대적인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한시적으로라도 절대화하려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지요.



이어서, 파국에 대한 통찰을 생각해봅니다. 제가 보기에 대개의 파국론은, 보편적인 (위기에 대한) 통찰을 독점하려는 탐욕과, 능히 그럴 수 있다는 망상에서 출발하고 있는 듯합니다.

“세상이 이러다가 오래 못가지......” 라는 생각은 안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남달라서, 화려하다 못해 미혹하는 말로 버무립니다. 특히 특정한 독점적인 정보를 주장합니다. 정보는 NASA의 리포트일 수도 있고, 계룡산 혹은 호렙산(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는)의 계시일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파국론의 실상인 것 같습니다.

파국론에 와서는 통찰이 이미 통찰이 아니라, 마트에서 드러누워 울며불며 떼쓰는 아이의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겁나는 광기의 눈동자들이 작성하는 음모론으로 보입니다. 통찰이 아닌, 반지성이며 공명심(功名心)이며 희극이며 사기극입니다. 특히, 반생명입니다.


(그러면 생명-생명운동의 통찰은 무엇이란 말인지...? 어설픈 고민은 다음에 계속)


- <초록이의 눈>은, 초록의 관점이 아닙니다. 딸 초록이의 눈을 거울삼는 제 이야기입니다.
- 2008. 10. 6
- 이진천  leftsky@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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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이 글은 '촛불은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가'에서 이어집니다.
-- 물론 별개의 글로 읽으셔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촛불에 대한 단상 (2) - '정치'에서 '삶'으로


1.
우리가 촛불시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려고 할 때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질문은 아마도 이 급작스럽고, 놀랍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 과연 '무엇'일까, 달리 말하자면 촛불은 누구인가, 촛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질문들일 것입니다. 이 질문은 촛불이 처음 나타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던져지고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요즘 여기저기에서 촛불시위에 관한 토론회가 개최되고 촛불시위를 기록하고 분석하는 책들이 출판되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변을 제시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그렇다면 과연 '촛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기존의 언론, 학계 또는 인터넷 공론장에서 제시되었던 몇가지 답변들을 금새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직접민주주의, 대의제의 실패, 기존 사회운동의 실패, 직접행동, 시민혁명, 국민주권, 민주공화국, 생활정치, 자율성, 집단지성, 자기조직화 등등. 이러한 키워드들은 이미 촛불을 설명하는 개념들로 널리 유포되어 있으며 촛불시위가 가지고 있는 일면들을 포착하고 나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러한 키워드의 목록을 보면서 어떤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개념들이 '촛불'에 참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을 제거하고 추상적인 '정치'로 환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3.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촛불이 처음 나타났던 시점으로 되돌아가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촛불의 시작에는 '촛불 소녀'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통해 정치와 민주주의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촛불 소녀'들은 처음에는 충격과 놀라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놀라움은 곧 이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으로 바뀌었고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은 10대 촛불소녀들의 등장을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도 '68 혁명'이 도래했다, 기존의 사회운동을 넘어서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2.0세대의 운동이 등장했다, 지도받지 않는 자발적인 다중이 등장했다, 투표권이 없는 10대들이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시작했다라고 말이지요. 또 일부 보수언론들은 이에 반해 촛불 소녀들이 나타난 것은 생각없는 10대 아이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이 미국산 소고기를 반대하기 위해 시위에 참석하자 우르르 소위 '오빠'들을 따라 놀러나온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4. 물론 10대 촛불소녀들의 등장을 직접민주주의, 집단지성, 자기조직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직접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적 개념들을 성급하게 적용하면서 광장에 나왔던 10대 촛불소녀들의 사회적 삶의 맥락들이 완전히 삭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때부터 10대 소녀들이 시위에 나왔던 이유와 배경들은 잊혀진 채 '직접민주주의의 주체'라는 추상적인 단어로만 10대 촛불 소녀들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오히려 보수언론의 악의에 가득찬 비난에 어떤 역설적인 진실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은 10대 소녀들의 등장에는 팬덤(fandom: 어떤 작가나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fan)의 집단, 또는 팬들의 영역이나 영향력을 의미하는 말입니다)이라는 사회적인 삶의 맥락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어떤 분들은 처음에 촛불 집회를 주도했던 10대 소녀들을 연예인들의 팬에 불과하다고 보도하는 보수언론에 맞서 10대 소녀들의 자발성과 합리성을 강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촛불시위가 처음 나타났을 때 동방신기의 팬클럽인 '카시오페이아'와 같은 아이돌 팬클럽들이 10대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그러한 이야기로 무시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촛불시위를 주도했던 10대 촛불소녀 중에 팬덤이 많다는 것과 촛불시위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여기서 이 관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여성주의 문화연구자들이 월드컵과 여성팬덤의 관계에 대해 분석한 현장 연구의 내용을 참조해보고자 합니다.
 

6. 월드컵과 여성팬덤의 관계에 대한 현장 연구들의 문제의식은 다음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왜 한국에서는 월드컵의 응원문화가 외국의 훌리건과 같은 집단적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축구가 강한 남성성을 대표하는 스포츠이며, 축구의 응원문화도 그러한 남성성의 강한 표출, 즉 집단적 폭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한국의 월드컵 응원문화의 질서정연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여성팬덤의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여성팬덤은 '빠순이'라고 폄하되고 이해할 수 없는 광적인 열광을 보여주는 집단이라고 생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을 인터뷰해보고 참여관찰을 해보면 여성팬덤이라는 집단은 많은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엄격한 규율을 갖추고 있는 매우 훈련된 문화집단입니다.
 

7. 예를 들면 아이돌 팬클럽의 경우 이들은 기획사나 음반협의 횡포에 맞서 자신들의 스타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집단행동을 할 줄 알며, 행사장에서 장소를 정리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등 공중도덕을 엄격하게 지킵니다. 그리고 이들은 콘서트에서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구호를 외치며, 미리 계획된 전략에 따라 응원하는 등, 특정한 '행동 양식'들을 그 팬덤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하면서 자신들의 '스타'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적절한 행동을 하게 되고, 이러한 행동들은 매우 조율된 질서를 형성하게 됩니다. 즉, 팬덤을 통해 형성된 이러한 '문화적 주체'가 건강한 시민의식을 가진 시민이라는 '정치적 주체'를 예비하고 형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의 월드컵 문화에서 나타난 질서정연함과 비폭력성, 시민의식은 외국의 축구 응원문화와 비교해볼 때 이러한 팬덤 문화를 통해 성장한 여성들의 참여의 기여가 매우 높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8. 저는 이러한 이야기가 10대 촛불 소녀들에게도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10대 소녀들이 스타들을 통해 촛불시위에 등장하게 된 경우가 상당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이들이 매우 훈련된 문화적 주체였기 때문에, 이미 팬덤이라는 하위문화 속에서 건전한 시민의식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보여주었던 절제된 열정, 시위를 놀이처럼 즐길 줄 아는 것, 비폭력에 대한 고집, 시위현장을 깨끗이 치우는 공중도덕 의식 등. 여기서 저는 10대 촛불소녀들을 생각없이 스타들을 따라나온 '빠순이'라고 보는 보수언론의 논조에 저항하면서도 동시에 촛불시위에 나온 10대 소녀들을 '팬덤'이라는 삶의 맥락을 제거하고 단순히 '자발성' '자기조직화' '직접민주주의'의 주체로 보려고 하는 담론들을 거부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자율성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10대 소녀들의 자기조직화 능력은 원래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까?(그렇다면 왜 10대 소년들이 아니라 소녀들이 더 열렬하게 나타났을까요?) 그녀들은 어떻게 직접민주주의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이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직접민주주의나 자발성, 자기조직화와 같은 거대한 추상적인 정치의 개념들을 넘어 그녀들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그녀들이 딛고 서있는 사회적 맥락으로 깊게 파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정치'에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10대들이 구체적인 삶의 맥락에서 갖고 있었던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들을 지지하고 고무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9. 이렇게 볼 때 촛불 시위는 어떤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 다양한 이유와 맥락에서 나타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또 분기하는 '교차로'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10대 촛불소녀들 뿐만 아니라, 촛불 시위에 참여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맥락들에 대해 관심과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울 드레서'와 같은 '패션 커뮤니티'는 어떻게 운동 단체들이 기존의 논리에 사로잡혀 무력함과 지지부진함을 떨쳐내지 못할 때 그토록 놀라운 주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82cook'과 같은 주부들의 요리 커뮤니티는 또 어떻게 촛불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걸까요?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 위에서 그러한 '정치'의 힘을 보여줄 수 있게 된걸까요? 물론 저도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촛불에 대해 생각하고 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다같이 풀어가야할 숙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키리냐가(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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